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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누이트의 소시오패스 구별법: 얼음 위 지혜의 방식

    혹독한 북극 환경에서 살아남아온 이누이트족은 단순히 자연에 적응한 민족이 아니다. 그들은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 어떤 인간이 위험한 존재인지를 직관적으로 구분해내는 지혜를 갖고 있었다. ‘쿤랑게타(Kunlangeta)’라는 개념은 바로 그런 위협적인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이누이트는 오랜 경험을 통해 죄책감 없이 공동체를 해치는 자를 판단하고, 그 결과에 대해 단호한 결단을 내렸다. 이처럼 원시 공동체에서 실행된 구별법은 오늘날의 복잡한 사회에서도 다시금 성찰할 만한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이누이트는 복잡한 진단 체계나 심리검사 없이도 문제 인물을 명확히 분간했다. 그들이 주목한 것은 단순한 성격 이상이 아니었다. 이들은 공동체 내부에서 지속적으로 거짓말을 반복하고, 타인을 조롱하거나 해코지하며, 공동 노동에 참여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몫은 요구하는 행동을 반복하는 자를 쿤랑게타로 판단했다. 심지어 결혼한 여성에게 지속적으로 접근하는 태도나 사냥터에서 일부러 위험한 행동을 하는 행위 등도 모두 경계 대상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행동이 반복되며 죄책감이나 반성 없이 지속될 때, 그 인물을 ‘더 이상 함께 살 수 없는 존재’로 여겼다는 점이다.

    그들의 방식은 단순한 감정적 보복이 아니었다.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암묵적으로 문제 인물에 대한 경고와 기회를 주었고, 이를 무시한 채 공동체에 위해를 가하는 이들은 결국 가장 원초적인 방식으로 ‘제거’되었다. 일부 구술 자료에 따르면, 사냥 중에 ‘실수인 척’ 그를 얼음 절벽 아래로 밀어버리는 방식이 실행되었다고 한다. 이 방식은 법이나 심판이 없이도 사회의 질서를 유지해온 공동체적 통찰이 담긴 선택이었다. 철저히 공동체 생존을 위한 결단이었기에, ‘사회적 정화’라는 측면에서 오히려 정당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현대사회에서는 이런 방식이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다. 그러나 이누이트의 방식이 의미 있는 이유는 ‘소시오패스적 행동’이 무엇인지를 행동의 축적과 맥락으로 판단했다는 점이다. 단순히 감정 기복이 심하거나, 조용하다고 해서 배제하지 않았고, 누구나 감정을 실수로 표출할 수 있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반복적인 비윤리적 행동, 죄책감 결여, 공동체를 파괴하는 행위가 쌓였을 때만이 쿤랑게타로 낙인찍혔다. 이는 오늘날 소시오패스를 분별할 때에도 유의미한 기준을 제공한다. 겉으로는 매너 있고 침착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내면의 공감 능력 결여와 수단화된 대인 관계는 결국 주변을 파괴하게 된다.

    이누이트의 구별법은 단호함과 공동체 중심의 윤리가 기반이었다. 그들은 인간이 고쳐질 수 없음을 미리 받아들였다. 이는 가혹한 자연환경 속에서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내린 결론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누이트는 “고칠 수 없다고 판단했을 때만” 해당 인물을 제거했다고 전해진다. 고대의 결정이지만 이 방식은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조직 내 갈등, 직장 내 괴롭힘, 학폭 가해자 등의 문제에 대해 다시금 중요한 화두를 던진다.

    현대사회는 법과 제도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그러나 실제로 피해자가 보호받지 못하는 상황이 늘어나면서 사람들은 이누이트의 원시적인 방식에서 묘한 통쾌함을 느끼기도 한다. 물론 살인을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공동체가 지속되기 위해 윤리적 기준을 마련하고, 명확한 선을 넘는 이들에 대한 대응 매뉴얼을 갖춰야 한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럼 죽어'라는 말은 다소 유머처럼 소비되지만, 그 이면에는 ‘더 이상은 안 된다’는 사람들의 피로와 결단이 담겨 있다.

    이누이트의 방식은 분명 극단적이다. 그러나 그들의 구별법은 인간에 대한 직관과 경험의 축적으로 구성되었으며, 단순한 배제 이상의 사회적 규범이었다. 우리가 이 방식에서 배워야 할 것은, 사람을 곧장 절벽으로 밀어버리는 행동이 아니라,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인식하고 공동체가 어떻게 그것을 견제할 것인가에 대한 성찰이다. 결국 공동체의 건강함은 위험 인물을 어떻게 다루느냐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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